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원 전투 (문단 편집) == 여담 == 전투가 끝난 후 피난갔던 주민들이 돌아와 시신 1만여 구를 거두어 성의 북문[* 성의 남문은 정문이며, 동문도 상서로운 방향(해가 뜨는 방향)으로 친다. 북문은 음의 기운이 있다 하여 취급이 좋지 못하다.] 근처에 합장하였다.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일곱 충신(정기원, 이복남, 임현, 김경노, 신호, 이덕회, 이원춘)의 충절을 기리고자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광해군]] 4년(1612년)에 남원부의 사람들이 남원성내(구 교육청 부근)에 위해서 칠충사를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충렬사(남원)|만인의총]]에 있는 충렬사에서 매년 9월 26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다만, 만인의총 내부에 묘가 있으나 시신이 없는 허묘이다. 시신을 수습했던 북문 근처는 일제강점기에 남원역이 세워졌고, [[증기 기관차]] 시절에 쓰다 버린 석탄 찌꺼기 따위를 합장한 곳에 버리는 바람에 이장 당시에 유골을 발굴하려고 했으나 폐탄 찌꺼기만 나와서 어쩔수 없이 허묘로 지었다고 한다. 남원성 북쪽에는 교룡산성이 있는데 접반사 정기원과 남원부사 임현이 인근 다른 고을 백성들을 교룡산성에 넣어 지키자고 양원에게 건의를 했다. 그러나 양원은 "멍청하고 겁많은 너네들이 적보고 무너지면 어쩔려고?"라며 무시했다고 한다. 근데 원래 산성이 적과 맞서 싸워 지키는데 읍성보다 더 좋다.[* 실제로 남원에 보존되고 있는 교룡산성 터를 답사해보면 알겠지만 주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경사가 매우 급해 방어하는 측에선 이만한 지형적 우위를 가지기가 어려울 정도다. 현재 남원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교룡산성으로 운동하러 간다거나 나들이 간다고 하면 얼굴이 핼쑥해질 정도로 격한 경사를 자랑한다.] 읍성은 왜구나 산적같은 비정규군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거라... 더군다나 교룡산성은 남원성을 보수하러 러 온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한번 둘러보고 "여기도 좋네?"라면서 같이 보수한 곳이다. 남원성을 보강할 때도 기존에 있던 현안[* 성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여기다 끓는 물이나 기름을 부어 성벽에 달라붙은 적들을 공격할 수 있다.]을 다 막은 걸 보면 장수로서 능력이 떨어지거나 조선군을 너무 얕잡아본 듯 하다. 남원성 전투에서 도망쳐서 살아돌아온 양원은 훗날 명나라에서 처형당하고[* 전주에서 사태를 관망하다 도주한 진우충은 곤장 100여대에 처해졌으나 형이 가산을 팔아 속죄받았다.] 그 목이 조선에 조리돌림당하게 된다. 처형된 이유는 적전에서 도망친 것도 있지만 적과 내통한 혐의도 있는 듯 하다. 실제로 양원이 전투 도중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벌일 때 조명 연합군 사이에서는 양원이 남원성과 조선군 및 조선 백성을 대가로 명군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았다는 소문과 성이 함락되도 양원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이복남이 명군 중군 이신방에게 "이거 사실이냐?"이라고 묻자 이신방은 "누가 그딴 말을 하고 다니는 거냐? 그런 말 못 나오게 해라!"이라고 답하며 부정했다는데... 정말 양원이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남원성에서 조선 백성들이 몰살당할 때 유일하게 살아 남은 김효의의 기록을 옮긴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상한 사실을 전한다. 8월 15일 저녁 일본군이 성 밖의 잡초와 논의 벼를 베며 기습 준비를 할 때 성내에서는 그 목적을 몰랐지만,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말 안장'을 준비하는 등 도망치려는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성 안의 기병이라면 양원이 지휘하던 요동 마군 3천 명 가운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이 함락되자 북문은 달아나려 말에 오른 명나라 군사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일본군은 미리 두세 겹으로 겹겹이 둘러싸 있다가 칼로 내려 찍으니 명나라 군사들은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달도 밝아 빠져나간 사람도 얼마 없었는데, 양원도 가정 몇 사람과 함께 말을 달려나가 간신히 죽음을 면한 생존자 중 하나였다. 류성룡은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왜적이 총병인 것을 알아보고 짐짓 빠져나가게 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간양록]]"의 저자인 [[강항]]은 참판 이광정의 휘하에 배속되어 군량 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남원성이 함락되자 영광으로 도망쳐온 강항은 왜군을 막아내기 위해 고향 사람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지만, 일본군의 기세가 막강해서 의병은 흩어지고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자 이순신의 진영으로 향하나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자세한 것은 [[강항]] 항목 참고. [[금계일기]]의 저자 노인도 [[권율]]의 명으로 이때 남원성에 파견왔다가 성이 함락되자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고전소설 [[최척전]]도 이 전투에서 헤어진 가족들의 고난과 재회를 다룬다.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김경진)|임진왜란]]에서는 이 전투를 처절하고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분류:임진왜란/전투]][[분류:공성전]] [include(틀:포크됨2, title=남원 전투, d=2022-07-04 21:32:3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